약령시(약전골목)
소재지 : 중구 남성동 일대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이름난 국내 제일의 약재시장이었다.
조선왕조 때는 대구뿐 아니라 원주, 전주, 공주에도 약령시가 있었지만 가장 규모가 크고 거래량이 많은 곳이 대구약령시였다.
조선조 발기에는 약정시가 늘어 청주, 충주, 진주에도 약령시가 생겼으나, 대부분 합령 또는 폐지되어 한일 합병 때까지 남은 것은 대구약령시 뿐이었다.
대구 약령시의 개시(開市)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설이 있다.
그 첫째는 조선왕조 때 각 지방관찰사들이 그 지방에서 나는 약재를 조정 에 진상했는데 대구 약령시는 경상도 관찰사가 진상할 약재를 모으기 위해 일년에 두 번 약시(藥市)를 개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인데 이 설에 따르면 약시(藥市) 개설은 1658年(孝宗 9年)부터가 된다.
둘째 설은 약재가 부족했던 일본에서 1630年께부터 대마도주(對馬島主)글 시체 조선왕조와 교역하게 줬는데 그들이 많은 약재를 요청하자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당시 대일무역의 실무를 맡았던 경상도 관찰사가 그 주재소인 대구에 약령시를 개설케 되었다는 주장인데, 여기 따라 약령시 개설은 1540∼50年대가 된다.
대구 약령시는 이 두가지 주장의 어느 하나로 이루어졌다기 보다 두 가지 필요에 의해 1650年대에 개시(開市)됐다고 보면 틀림없겠다.
그때의 약령시는 현재 한약종상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는 남성로 약전곡목이 아니라 대안동 일대(경북인쇄소∼대구경찰서)였다.
그때 약령시는 춘시(春市)와 추시(秋市)로 나뉘어 춘시(春市)는 2月 3日부터 13日까지 열흘동안 열렸고, 추시(秋市)는 10月 3日부터 13日까지 열흘동안 열렸다 .
춘시(春市)와 추시(秋市)는 그 열리는 장소가 달랐는데 현 대안동(大安洞) 천리교당 부근에 있던 객사(客舍) 達城館를 중심으로 춘시(春市)는 그 남쪽에서 열려 일명 남시(南市)라 했고, 추시(秋市)는 북쪽에서 열려 북시(北市)라 했다.
객사(客舍)는 원래 조선왕조 역대 왕을 제사하는 곳으로 관찰사가 부임하면 이 곳에 먼저 참배하고 차례(茶禮)를 올렸으나 조선 발기에는 제사를 소홀히 하여 황폐해졌다 .
객사는 부지 약 1천여평 건평 약 200평 규모였다 하는데 일본 거류민단이 철거해 버렸 다.
이처럼 객사를 중심으로 그 남북에서 열렸던 약령시는 객사가 철거된 후 남시는 폐지되고 북시(北市)만 존속하다가 현재의 남성로로 오늘의 약전골목이 된 것이다.
약령시(藥令市)와 강원도 산삼(山蔘)장사 얘기
욕심 많은 서창규를 골린 강원도 산삼장사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약령시가 열리면 해 마다 찾아오는 강원도 산삼장사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일년 내내 강원도 깊은 산속을 헤메며 산삼을 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대구 약령시에 와서 그것을 팔 곤했다.
그때 약령시는 일년내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봄, 가을 두 차례 각각 열흘씩 열렸고 이 때를 이용해 강원도 청년이 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받기 위해서이다.
그때 대구 동성로 부근에 2천석 넘게 하는 서창규란 갑부가 있었다.
서창규는 돈은 많았으나 인색해서 이웃을 도울 줄 몰랐다. 어쨌거나 여름동안 잔병치례를 한 서창규는 쇠약해진 몸을 보하기 위해 가을 약령시에 나타날 강원도 산삼장사를 기다렸다.
약령시가 열리고 강원도 청년이 커다란 산삼을 들고 나타났다.
서창규는 그 중에서 제일 좋은 놈을 골라 값을 물으니 6백원을 달라 한다. 그때로 선 큰 돈이다.
서창규가 값을 좀 까깎자고 부탁했으나 그 아래로는 절대 팔지 않겠다는 청년의 말에 한 꾀를 생각해 냈다.
『할 수 없지 . 어서 삼이나 달이게 』
그때 산삼장사는 삼을 그냥 파는 게 아니라 약탕관에 넣어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게 먹여주는 것이 관례였다.
청년은 서창규가 지켜보는 앞에서 약탕관에 산삼을 넣고 달이기 시작했다.
한나절이 지나자 산삼은 다 달여졌다. 청년이 고운 삼베로 산삼을 짜서 서창규에게 내밀자 서창규의 태도가 돌변한다.
『이 사람아 아무래도 6백원은 너무하이. 나는 3백원 밖에 못주겠으니 3백원에 팔려거던주고 아니면 그냥 두게 』 다 달여논 산삼, 이제 네가 어찌겠느나는 속셈이나. 서창규의 꾀에 넘어간 청년은 억울하고 분했다.
이제 다를 사람에게 팔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 꾀보에게 헐값에 주기는 싫다.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알겠습니다』 산삼장사 청년은 산삼을 훌쩍 자기가 마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 서창규가 청년을 말리려 했으나 노란 산삼국물은 청년의 목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그후 3년이 지난 후 여니해 처럼 약령시에 산삼을 팔러온 청년은 일부러 서창규를 찾아 갔다.
서창규는 그때 보다 더 쇠약해 있었다. 고소하게 생각한 청년은 알통이 울퉁불퉁한 굵은 팔뚝을 걷어 보이며 『그렇잖아도 건강한 몸이 그때 어른신네 때문에 억지로 먹은 산삼 덕분에 더욱 건강해져 기운이 넘칩니다. 』고 약을 올렸다. 서창규는 얕은 꾀로 산삼을 헐값에 먹으려다 구하기 힘든 큰 산삼을 놓친 것을 두고 후 후회했다 한다.
약령시에 대한 두 번째 얘기
『저놈 잡아라.! 저 도둑놈 잡아라』
머리를 치렁치렁 내려 땋고 남루한 옷에 짚신을 신은 소년이 쏜살같이 사람속을 헤치며 달아나고 뒤에선 수건을 동여맨 늙수구레한 상인이 고함을 지르며 따라 갔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보여 늘고 소년은 남문 밖에서 붙들렸다.
『이놈! 야 이 도둑놈아』
상인은 소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소년은 울상이 되어 바들바들 떨다가 손에 쥐었던 사삼(沙蔘)을 내놓았나.
『이놈아 우짜자고 이 물건을 훔쳐 엉?』 소년은 눈만 껌벅껌벅 하고 아무 말이 없다.
『이놈이 벙어링강? 어서 말해봐 이놈아』 소년은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어서 말해 이놈아 운다꼬 그냥 놔 줄줄 아나? 』 소년은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홀 어머님이 병이나서 생명이 오락가락 합니더 』
『그러만 돈을 주고 사갈 것이지』 상인의 말이 좀 부드러워져 쪘다.
『모자가 둘이 살아 왔는데 저는 팔공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어머님을 봉양해 왔습니더 그러다가 올 봄에는 저마자 앓아 누벗다가 인자 제우 일라보니 어머님이 말이 아니었습니더 이웃 노인 받을 들으니 사삼이 좋다캐서 돈은 없고‥‥』 소년은 더욱 흐느껴 울었다.
『쯧쯧! 그러만 나한테 사정 얘기라도 할 거시..... 효도는 죄가 아니니라. 자아 어서 갖고 가거라』 상인은 빼앗은 사삼을 되려 내 주었다.
'달구벌 알기 > 중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구지명유래 31 - 잉어샘(청어샘) (0) | 2012.03.19 |
---|---|
중구지명유래 30 - 오포산(午砲山) (0) | 2012.03.19 |
중구지명유래 28 - 아미산(峨嵋山) (0) | 2012.03.19 |
중구지명유래 27 - 솟통못 (0) | 2012.03.19 |
중구지명유래 26 - 서양인(西洋人)의 무덤 (0) | 2012.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