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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구 지명 유래 15 - 삶이들 , 석샘이, 성당못

종영 2012. 2. 29. 16:10

달서구 지명 유래 15 - 삶이들 , 석샘이, 성당못

 

삶이들

소재지 : 달서구 파호동 57-280번지

    강창에서 화원면 구라동 두걸도랑까지 광대하게 뻗은 삶이들은 갯땅, 복새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삶잇개"라고도 한다.

   이 벌의 서편은 낙동강에 연해 있고 동편은 원덩(원등)이라고 불이는 1.5∼2m가량의 높은 지대와도 접해 있다.

   이 삶이들은 방대한 하천부지가 오랜세월동안의 풍화작용과 인공적인 개발에 의해 오늘날의 비옥한 땅으로 발전하였다.

   지금부터 약 50∼60年전에 이 곳에서 나는 풍요한 농산물의 손길방지를 위해 원덩의 흙을 모아 초가집 세칸을 지어 지키기도 하였다.  집과 집 사이는 약 400m가량 떨어져 있으며 두춘, 감동, 윤필의 이름을 가진 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낙동강 홍수때마다 집이 물에 잠겨서 인근 호림동,  월암동에 피신하기도 했는데, 때로는 집이 물에 떠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집앞의 100년 묵은 수양버들 나무에 붙들어 매기도 했다.

   그러나 태풍 사라호 때 집과 나무도 다 떠내려가고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있다.

 

석샘이
 
소재지 : 달서구 상인동

   월배(月背)에서 대덕산을 향해 2㎞쯤 가면 달배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으니 여기가 월배란 이름이 유래한 곳이다. 이 골짜기를 500m가량 깊숙이 들어가면 깍아 세운 듯한 층암절벽 아래쪽에 바위굴이 있으니 이 굴을 석샘이라 부른다.

   이 굴은 상하좌우 모두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굴 천장에서 일년 내내 일정한 양의 맑고 찬물이 떨어지는데 이 물은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라 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찾는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 옆 골짜기는 용이 있었다하여 용골이라고도 한다.

   석샘이란 이름은 여기서 붙은 것인데 이 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부터 약 천여년전 이곳 절벽 아래 석두암이란 아담한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에는 주지 한 사람과 10여세 되는 상제가 있었다.  이 때는 지금 약수가 떨어지는 천장 바위틈에서 쌀이 졸졸 흘러나왔다 한다.

   쌀은 하루 종일 모아야 중과 상제 두 사람의 세끼 밥을 지어먹을 정도의 양이었다.
   두 사람중 어느 한 사람이 일이 있어 출타하면 쌀의 양이 줄어들 정도로 신기한 것 이었 다.

   어느 날 주지가 외출하고 없을 때 매일 밥만 먹어 싫증이난 상제가 쌀을 좀 더 많이 모아 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으로 부지깽이로 쌀 나오는 구멍을 쑤셨더니 쌀은 나오지 않고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얼마후  핏물도 그쳐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지금처럼 물만 졸졸 흘러 나왔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쌀을 먹고 생활하던 석주암은 그 뒤 망해버렸다 한다.

   석샘이 약수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수십년전 일이라 한다.

 

성당못

소재지 : 달서구 성당1동 일원

   성당못은 대구에서 화원 방면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둘레가 약 1㎞나 되는 저수지로 두류산이 대구시가지를 가려 큰 도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한적한 곳이었다.

   도축장이(성당못위에 있었다) 있었는데 지금은 중리동으로 이전하였다.

  북으로 향적산(香積山), 남으로 파자산(巴字山) 서남쪽으로는 명경대(明鏡臺巴) 들러 있고 西로는 짤막한 제방이 성서 평야를 이루고 있어 아늑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성당못은 이조 중엽 蔡氏(채씨) 성을 가진 판서의 집터로 아주 명당이었는데 국풍(나라에서 지정한 풍수)이 지나다 이 집터를 보고 장차 임금이 태어날 터라고 임금께 고해 바쳐 이 곳에 다시 집을 짓지 못하게 못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못은 동으로는 시내로 들어오는 길. 서쪽으로는 못밑, 남쪽으로는 화원이 있어 명당이나 북쪽으로 두류산이 막혀 왕이 태어나지 못했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