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바위
소재지 :중구 태평로2가 35번지
태평로 시민회관 앞 잔디밭에 높여 있는 칠성바위는 지석묘로 이것은 옛 공회당서남쪽 소나무 숲 사이에 있던 것이나 1973년 대구시가 광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지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지석묘는 탱석(撑石) 또는 고인돌이라 부르는 선사시대 무덤으로 한반도 거의 전역에 분포돼 있다. 이것은 거대한 돌을 개석(蓋石)으로 하고 몇 개의 돌을 고여서 석실을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매장했다.
대구에는 많은 지석묘사 있었으나 대구의 지석묘 분포 상황은 신천 범람원의 상류 쪽인 봉덕동에서 대덕동을 거쳐 삼덕동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하류 쪽인 교동과 태평로를 있는 자연제방 위에, 그리고 역시 상류 쪽인 상동, 중동, 하동을 있는 충적원(沖積源)에 무리를 이루어 연속하고 이밖에 비산동 구릉과 대당동, 아미산에도 지석묘가 있었다.
대구의 지석묘는 그 분포상황을 볼 때 단순한 무덤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선사시대 취락집단이 생활권 확로를 위해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기 집단의 존재를 나타냄과 동시에 커다란 바위를 세워 생활권 구역을 명확히 표시하는 상징적 기념물로도 삼았던 것 간다.
칠성바위는 지석묘 중의 하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기 못 낳는 사람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는 민간 신앙의 대상물로 바뀌었는데 칠성암의 그 같은 영험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조 19년에서 21년까지 3年간 경상도 감사로 이태영(李泰永)이란 사람이 재직했다. 그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북문밖(대구읍성이 있을 때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는데, 북문은 지금 북성로 경북인쇄소 부근에 있었다)에 떨어져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난 이 감사는 비록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 이상해 별이 떨어진 북문밖을 나가보니 어제까지 없었던 7개의 커다란 바위가 북두칠성모양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감사는 이것이 필시 좋은 징조일 것이라 생각하길 7개의 바위에다 석공을 불러 자기 일곱아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겼다.
즉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부터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準), 의장(義章), 의라(義拏)의 순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후 일곱 아들이 차츰 장성함에 따라 얼굴이나 성품이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닮아 가는 것이다. 즉 울통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자라서 무관이 되었고 깨끗하고, 돌올하게 생긴 세 개의 바위에 그 이름이 새겨진 세 명 아들은 문관으로 출세했다. 그리고 그저 평범하게 생긴 바위에 그 이름이 쓰여진 한 아들은 아무 벼슬도 못 하고 그저 평범한 일생을 마쳤다. 그 뒤에 이의두(李義斗)의 후손이 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와서 선조의 기적을 영원히 전하기 위해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또 그 중앙에 정자를 세인 의북정(依北亭)이라 했다.
그러나 의북정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해 헐려 버렸고 그때 심은 소나무만 노송으로 자랐는데 그 뒤부터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곳에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다.
칠성동(七星洞)이란 동명은 칠성바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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