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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구 서원,정각, 누각 2 - 병암서원(屛岩書院 星州 都氏)

종영 2012. 2. 29. 16:16

병암서원(屛岩書院 星州 都氏)

     소재지 : 달서구 용산동(서촌) 456

 

 

    이 서원은 1780년(正祖 5, 정조) 鄕士林(향사림)의 公議(공의)로 西材(서재)에 祠宇(사우)를 建立(건립)하고 星州人(성주인) 都應兪(도응유)와 慶兪(경유) 兄弟(형제)를 享祀(향사)하여 오다가 1864년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5년 宗財(종재)와 후손들의 열의 로 重建(중건)하였다.

    都應兪(도응유)의 호는 翠厓(취애), 成均生員(성균생원)이며 寒岡 鄭逑(한강 정구), 樂齋(낙재) 徐

思遠(서사원) 兩門(양문)에 師事(사사)하여 文章德行(문장덕행) 當世(당세) 推重(추중) 되었다.

   李适(이괄)의 亂(난)에 倡義(창의)하여 奮義都有司(분의도유사)가 되었고 丁卵胡亂時(정난호란시)

는 文壯公(문장공) 鄭經世(정경세)가 號召使(호소사)가되고 翠厓公(취애공)은 上將(상장)이 되어 軍校(군교)를 配布(배포)하고 軍糧(군량)을 經理(경리)하였으며 晦齋(회재), 退溪(퇴계) 두 先正(선정)에 대한 모함과 寒開先生(한개선생)에 대한 무고를 변호함은 물론 築城選將(축성선장)의 策略(책략)을 立案上泰(입안상태)하였다.

    都慶兪(도경유)의 자는 來甫(내보), 호는 洛陰(낙음), 寒問(한문), 樂齋(낙재), 慕堂(모당) 孫處訥(손처눌) 三門(삼문)에 受業(수업)하였고 1624년 李造(이조)의 亂(난)에 義兵將(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丁卯胡亂時(정묘호란시)는 東宮(동궁)을 모시고 南原(남원)까지 갔다 還宮(환궁)하니 義禁府都事(의금부도사)로 特除(특제)되었다. 扈衛急亂(호위급란)의 공로와 鎭邑守邊(진읍수변)의 업적이 뛰어났으며 鳳山郡守(봉산군수) 재임시에는 郡民(군민)들이 그의 공로와 德(덕)을 생각하며 去思碑(가사비)를 세웠다. 平讓在任時(평양재임시)는 都差使(도차사)가 되어 瀋陽(심양)에 들어가 被虜者(피로자)들을 脫還(탈환)하여 왔으며 公(공)의 善政(선정)에 御使 趙壽益(어사 조수익)의 上啓表裏一襲(표리일습)이 下賜(하사)되고 左承旨(좌승지)로 贈職(증직)되었다.

    境內(경내)에 崇賢祠(숭현사), 雙徵門(締門 쌍징문 체문), 紹源門(旅門 소원문 여문)이 같이 있으며 또 文集木板(문집목판) 300여점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