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알기/달서구

달서구 지명 유래 3 - 본리동(本里洞), 상인동(上仁洞), 성당동(聖堂洞)

종영 2012. 2. 29. 15:54

 

달서구 지명 유래 3 -  본리동(本里洞), 상인동(上仁洞), 성당동(聖堂洞)

 

 

본리동(本里洞)

   대구부 감물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천리(甘川里), 작촌동(畿村洞)을 합하여 본리동이라고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유래에 의하면, 지금부터 150여年 전 본리초등학교 위치에 있는 일원에 농가에 있는 뜸뒤주(쑥대나 싸리, 뜸 따위를 새끼로 엮어 땅위에 둥글게 둘러 치고 그 안에 감자 따위 곡물을 채워 쌓은더미) 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고 해서 "작촌(鵲村)"이다.

   현재 본리시장 일대는 도로가 완전 포장이 되었지만 옛날에 이곳 토질이 붉은 진흙땅이서 비가 온 뒤면 땅이 매우 질어서 사람들의 통행이 매우 불편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를 지루지(地漏地라)고도 하는데 이곳 토질이 진흙땅이어서 통행에 많은 불편을 주어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상인동(上仁洞)

    이 지역의 명칭은 상인산의 이름을 따서 상인리라 하였다가, 대구부 월배면 의 지역으로 1914년에 채정동과 본리동을 합하여 상인동이라하여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성당동(聖堂洞)

성당동(聖堂洞)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예술회관자리와 대성사, 독산 부근(성당못 서편)이며 성댕이 또는 상댕이라고 불렀다.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고 불렀는데 그 유래는 다음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1) 길지(吉地)로서 인명의 피해가 없는 좋은 땅이란 뜻으로 성당못을 중심으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어서 성당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남씨, 채씨들이 살았는데 정승, 판서가 나서 남정승, 채판서의 마을로 알려졌으나 왕기가 서렸다고 해서 용머리격인 독산에 철퇴를 쳐서 남씨, 채씨의 번창을 막았다는 얘기도 있다.

   2) 여기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고 하여 성당동이라고 명칭되었다는 얘기다.

      이 성당은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 대성사 위쪽(두류산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 폐쇄되었으며 1960년 두류산 공원 개발로 순환도로가 개설될 때까지 그 터와 사택이었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대구부 달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에 대구부가 확장함에 따라 대구부에 다시 편입되었다.

     별장의 설립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동명이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했으므로 전혀 근거없는 사실은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