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알기/대구 이바구

대구의 지명에 얽힌 사연들

종영 2012. 2. 29. 13:39

대구의 지명에 얽힌 사연들

 

사람들에게 이름이 있는 것처럼 땅에도 제각각 이름이 있다. 그냥 부르기 좋다고 갖다 붙인 이름은 아니다. 땅 이름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 풍속, 의식, 도덕 등 고유한 특성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사적 대사건의 흔적이나 윤리적인 일화가 지명 전설로 토착화된다거나, 풍수 지리적 형상에 얽힌 유래가 알게 모르게 감춰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들이 전승하고픈 이야기나 흔적을 지명으로 남겨 ‘언어 전승물’로 만들려는 심리는 고정된 땅에 오랜 시간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문화적인 연대감과 삶의 의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구의 각 동(洞)과 특정장소의 명칭도 예외는 아니다.

△비산동(飛山洞)=풀면 ‘날뫼마을’이다. 옛날 한 아낙이 비산동 주변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등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돌아보니 큰 산이 하늘로 날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산이 날아 간다~(飛山)”고 소리를 질렀다. 산도 아낙의 소리에 놀랐는지 그만 멈춰 그 동네에 자리 잡았던 것. 그 산이 운석이었다는 설이 있다.

△팔공산(八公山)=고려 건국 후 팔공산으로 불리게 됐다. 건국 8공신(김낙`신숭겸 등)을 추모하는 사당이 이 산의 8봉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당은 없고 이름만 남아 있다.

팔공산 주변지명엔 왕건과 관련된 일화도 많다. 견훤에 쫓겨 군사를 모두 잃은 고개인 ‘파군재(破軍재)’가 있고, 도주하던 중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그들을 독려하는 의미에서 쉬지 말고 빨리 가자고 독촉했다는 ‘무태(無怠)’, 지금의 동구지역까지 도망해서야 마음을 놓았다는 ‘안심(安心)’ 등이 그러하다.

△감삼동(甘三洞)=약 300년 전 이 곳을 지나던 원님이 나무에 달린 붉은 감을 보고 탐스러움에 감탄하자 마을대표가 달고 맛있는 감 3개를 건네며 동네이름을 새로 짓기를 부탁하니 그 원님이 감 3개를 받은 동네란 의미로 감삼동으로 부르게 했다.
 
△대명동(大明洞)=명(明)나라를 그리워하는 동네란 뜻이다. 임란 때 이여송과 함께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은 이여송의 참모로 높은 공적을 쌓았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온 그는 난이 평정된 후에 조선에 귀화한다. 조정에선 그에게 편안한 생활을 하게끔 배려하지만 노년이 되자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대명사’라는 절을 짓고 살았다. 이후 그 절의 이름을 따 마을이름을 대명동으로 불렀다.
  
△반고개=옛날 성내로 시집 온 성밖 출신 새댁이 명절 때 친정에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심정에서 친정소식을 알고 싶어 성곽이 있던 고개 반쯤에서 성밖으로 시집간 아낙들에게 친정 안부를 묻고 하던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반월당=원래 이 곳은 수양버들과 아까시가 우거진 야산으로 인적도 드문 한적했던 곳. 여기에 차병곤씨가 2층 목조건물을 짓고 ‘반월당 백화점’을 열고 영업을 시작하자 집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 백화점은 한국인이 세웠고 주인이 대구 토박이여서 일제치하에서 더욱 유명했던 곳.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해방 후 백화점이 문을 닫고 길이 나면서 가게 이름만이 지명으로 남아있게 된 경우다.
     
△범어동(汎魚洞)=풍수지리적인 지형을 보고 지은 땅 이름. 당시 산세가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 냇물이 떠 있는 모습 같다고 해 범어동이라 이름 붙이게 됐다.
                  
△안지랑이=원래 한자어로는 안좌령(安座嶺)이다. 양녕대군이 물 맞고 비 맞고 안아서 놀기 좋다는 뜻으로 붙인 안좌령이 변해 아지랑이가 됐다.
                  
△황금동(黃金洞)=조선시대 이 곳은 오곡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산엔 나무가 울창해 황청동(黃靑?洞)이라 불렸으나 그 후 발음상 황천동으로 잘못 쓰이는 일이 많았다. 한 땐 택시기사들도 그런 곳에 가기 싫다고 하자 1977년 지금의 황금동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작성일: 2006년 03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