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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지명유래 10 - 경상감영공원(옛 중앙공원(中央公園))

종영 2012. 3. 14. 09:32

 

 

경상감영공원(옛 중앙공원(中央公園))

소재지 : 중구 포정동

 

 

  1970년에 조성된 조그마한 공원이지만 대구의 중앙지에 위치하고 있어 시민의 긴요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중구(中區) 포정동(布政洞) 21번지에 위치하고 면적은 시유지 7필지 4,162평이다. 경상감영공원(옛 중앙공원(中央公園)) 1601년(宣祖 34年) 경상도 관찰사영이 안동(安東)에서 옮겨와 1910년 한일합병까지 있었던 곳이다. 경상감영(慶尙監營)은 1670年 1730年 1806年 세 차례 큰 화재로 소실되었고, 1807년에, 선화당(宣化堂), 징청각(澄淸閣) 등이 중건되었다. 1910年부터 1965年까지 경북도(慶道道) 청사로 사용되었다. 1965年 2月 2日 건설부 고시 제 1387호로 공원으로 지정고시되었다.  1970年 5月 1日 건설부 고시 제 199호로 지적(地籍)이 고시되었다. 1972년 선화당(宣化堂)과 징청각(澄淸閣)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392년(태조 원년)에 설립된 경상감영(慶尙監營)은 여러 곳에 옮겼는데 1601년(宣祖 34年) 경상좌, 우도가 합치면서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안동(安東)에서 옮겨져 대구부사(大邱府使)를 겸하게 되었다.

   선화당(宣化堂)은 3차례 큰불을 만나 소실되었다. 맨 처음의 화재는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민시중(閔蓍重)의 시대로 1670년(현종 11年) 3月 22日 감영 소속의 영리청(營吏廳)에서 발화하여 신구(新舊)의 문서 및 기록을 소진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성(京城)의 각사(各司)는 경상도 왕복문서를 등사하여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화의 원인은 감영의 이서배(吏胥輩)가 공금을 횡령하였다가 문서를 소각함으로써 증거를 없애려고 방화한 때문이었다. 두 번째 화재는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조현명(趙顯命)이 재직 중인 1730년(英祖  6) 7月에서 8年(1732年) 10月 사이로 추측되는데 영사(營舍)가 전소하여 모두 신축하였다. 마지막의 경우는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윤광안(尹光顔)의 시대로서 1806年(純祖 6年) 12月 3日 책실(冊室, 비서실)에서 발화하여 징청각(澄淸閣) 23간, 선화당(宣化堂) 36간, 여수각(如水閣) 12간, 내아(內衙) 36간, 연초당(燕超堂) 13간, 좌우익량(左右翼廊) 36간, 공고(工庫) 28간, 등 모두 184간을 전소시켰다. 가까스로 선화당(宣化堂)에 봉안된 어필(御筆) 현판 관찰사 병부(兵符), 교서(敎書), 인신(印信) 및 각 진(鎭)의 명부를 건졌을 뿐이었다.

   선화당(宣化堂) 건물은 세번째 화재가 있은 뒤인 1807년(純祖 7年) 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중건한 것이다. 건물의 기왓장에 「嘉慶十二年丁卯二月臼(가경십이년정묘이월구)」로 쓰여 있어 이것이 건물을 중건한 해로 보인다.  청(淸)의 연호인 가경(嘉慶) 12年은 純祖 7年 즉 1807年이다.

    선화당(宣化堂)은 기와를 이은 목조로 건평이 58경으로 남아 있다.

    징청각(澄淸閣)은 1789年(正祖 13年)에 감사 이조원(李祖源)이 창건했는데 선화당(宣化堂)이 소실된 1806年(그해 純祖 6年)에 함께 타버려 이틈해인 1807년(純祖 7年)에  감사 윤광안(尹光顔)이 중건하였는데 징청각(澄淸閣) 동편에 옥령루(玉靈欄(옥령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징청각(澄淸閣)은 목조기와집으로 건평 84평이다. 1972年 12月 29日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 향교에 있던 역대관찰사의 선정비 등 석비(石碑) 27기를 이곳으로 옮기고 경상감영 설치 400주년을 기념하여 경상감영공원이라 이름하였다. 공원경내에 당시 정청(正廳)이었던 선화당(宣化堂)과 징청각(澄淸閣) 및 절도사이하개하마비(節度使以下皆下馬碑)등이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