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알기/대구 이바구

1888년경 대구읍성을 기록한 샤를 바라

종영 2010. 2. 4. 10:50

 

1888년경 대구읍성을 기록한 샤를 바라

 

 

1888년경 대구를 찾은 프랑스의 지리학자인 바라(Charles Louis Varat)의 기행문에 적힌 내용을 보면, 대구읍성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북경성처럼 위용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린 이제 사라진 읍성이 다시 재현되는 감동의 순간을 보고싶습니다.

 


능선을 따라서-성벽과 문-돈을 바꾸다-속리산을 내려가며-요새-산적-학문적인 탐험인가 군사적 원정인가-방적공들-짐꾼들, 문관의 푯대-새처럼 날아올라-강과 개천-고기잡이-어린이에 대한 인류학적 소견-닭장수-장터에서-기절한 척하다-기념물들-변두리 주막-대구-지방 관찰사의 환대-도시를 둘러보며-조선의 잔치-출발-끔찍한 나팔소리-청도-단추구멍에 들꽃을 꽂고-비-밀양의 건축술

 산맥을 가로질러 꼬박 이틀 동안을 등반한 뒤에야 우리는 속리산의 마지막 계속 자락에 위치한 마을 사거리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말들의 짐을 풀고 대신 사람들을 따로 고용해 등짐을 지어 날라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고 바위투성이의 험난한 산길이 이어져 있어 산등성이를 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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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 알다시피 이런 나의 생각은 또한 얼마나 순진한 발상이란 말인가!
 물론 군사적 목적의 원정은 전혀 다른 얘기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전쟁의 폐해만큼이나 여러 유익한 성과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프랑스인은 그와 같은 원정에서 얼마나 많이 쓰러져 갔는가! 대표적으로 저 불운했던 크람펠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상기해 보자.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슬퍼했었던가! 애가 타게도 나는 지금 하필 이억만 리 떨어진 이 오지에서 그의 아득한 무덤을 향해 애도의 꽃다발을 던지고 있다. 그처럼 원기 왕성하고, 고매한 인격과 섬세한 마음을 겸비한 인물의 죽음보다 프랑스에 더 충격적인 손실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곳에서 죽어 간 그를 비롯한 많은 동포들을 나는 아예 학문의 순교자라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그들을 애도하고 명복을 빌어 주자! 하지만 그들을 결코 가엾게 여기지는 말자. 그들의 죽음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바쳐진 것일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의 발길이 새원과 울모리, 불정을 거쳐 육산동 계곡으로 들어가 경상도의 중심 도시인 대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변 경관이 또 달라졌다. 이번엔 방대한 목화밭이 사방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미 수확이 끝나서 관목 가지들만이 드문드문 있고, 따가지 않은 목화송이 몇 덩이가 마치 새하얀 눈송이처럼 매달려 햇살 아래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가히 한 폭의 멋진 풍경화가 따로 없었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 거듭 말하지만, 나는 조선처럼 공기가 투명하게 빛나고 맑은 나라를 본 적이 없다. 이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보리나 벼를 수확하는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목화로 천을 짜는, 전혀 다른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거리 여기저기 큼직한 솜덩이를 등짐 져 나르는 조선인들이 활기차 보였다. 도로 사정이 열악해 거의 모든 운송수단이 그와 같은 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짐꾼들은 자연스레 그들끼리 대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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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업조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관리하고, 자체 내에서 사법권을 행사함으로써 현지 관리의 법적 간섭을 따돌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추적을 당하기라도 할라치면 재빨리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내빼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파업을 하는 셈이고, 그들의 도움 없이는 이동이나 운송 자체가 불가능한 사정으로 결국 아무런 제재 없이 다시금 일에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마치 북부 러시아나 시베리아에서 흔히 보는 대규모의 집단 노동조합을 떠올리게 한다. 흔히들 그들은 직업상, 습속이나 풍기가 상당히 미흡하다고 문란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정반대 같다. 그들의 아내들은 무척 정숙한 편이며, 간통은 죽음의 형벌을 받기 일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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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조선의 토종닭은 꽁지만 1미터가 넘고, 눈자위로는 두 개의 하얀 동그라미 무늬가 있어 마치 코친차이나 닭과 사촌처럼 보이는 데도 여우가 전혀 겁을 집어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닭들의 그 기막힌 육질은 내게 소고기 생각을 잠시 접어두게 할 정도였고, 달걀 역시 자주 나의 식탁 메뉴로 등장하였다.
 대구에 이르는 길은 아직 멀고 멀었다. 따라서 독자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기 위해, 마치 새처럼 훌쩍 날아올라 여행을 하는 것처럼 앞으로의 여정 일부를 빠르게 지나치도록 하겠다. 그래야 낙동강과 그에 딸린 이름 모를 수많은 지류들을 시간 낭비하지 않고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행동이라는 이름의 계곡으로 들어섰고, 곧이어 낙동강의 첫 번째 지류를 건넜다. 조용하게 흐르는 그 개천 여기저기에서 귀족이지만 가난한 조선인 몇몇이 독특한 방식으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즉 잡은 물고기의 비늘을 즉시 벗기더니, 강낭콩을 재료로 한 소스에 산채로 담가 그대로 먹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철학자 같은 표정을 짓고 몇 시간 동안이나 태연자약하게 앉아, 같은 방식으로 낚시와 식사를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사실 극동지방의 물고기 맛은 별미 중에 별미이다. 일본에서 약간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아직도 감칠맛 나는 그 느낌이 입천장을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웅원리와 돌고개, 원촌, 해평, 장태, 장내 등지를 지나 낙동강의 두 번째  지류를 건넜다. 조선의 많은 강과 개천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수심이 얕은 데다, 급류를 형성하는 군데군데의 바위들로 인해 배를 타고 건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배를 통한 상권의 교류 또한 거의 전무한 지경이다. 오로지 배처럼 보이는 것이라곤 이리저리 놀란 물고기들을 몰아서 미리 쳐놓은 그물에 가둬 잡기 위해 떠 있는 자그마한 거룻배들이 전부였다. 이처럼 민물 어업은 생선이라면 날 것, 말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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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그밖의 여러 방식으로 저장한 것을 갈지 않고 항상 즐겨 먹는 조선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업이다. 우리가 건넌 세 번째 낙동강 지류는 다른 강들과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어김없이 꽁꽁 언다. 따라서 그때의 고기잡이는 얼음에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그곳 주위로 그물을 드리운 다음 얼음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두드려서, 놀란 물고기들을 그물 속에 몰아넣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얼음이 든든할 정도로 꽁꽁 얼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름과 겨울의 최고, 최저 기온이 각각 영상 35도와 영하 35도는 충분히 도기 때문이다. 겨울의 진풍경 중에, 특히 북쪽 지역에서 조선인들은 그것들 덕분에 중국과의 전쟁에서 몇몇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고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 우리의 여정은 계속해서 가창무를 지나 두어 개의 언덕을 더 넘고서야 다시 낙동강의 본류와 만나게 되었다.
 강의 폭이 4백여 미터가 넘었지만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 우리는 우선 말들과 짐을 배에 싣기로 했는데, 때마침 강가에 벌거벗은 아이들이 수없이 몰려와 우리의 행동거지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짬을 내 그 아이들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을 몇 자 적어 보았는데, 여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우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이 말랐지만, 균형은 잘 잡혀 있는 몸집이다. 두개골 모양은 단두(短頭)형인 데다 크기는 중간 정도이고, 뒷부분이 약간 치켜올라가 있으며, 가녀린 목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이다 못해, 약간 붉은 기운마저 감돈다. 반짝거리는 까만 눈동자는 쾌활함으로 생기가 넘친다. 코와 턱은 자그마하고, 마찬가지로 작은 손과 발은 매우 가녀려서 관절 부위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팔과 다리의 선은 균형이 매우 잘 잡혀 있다. 몸 전체가 마치 활처럼 뒤로 젖혀진 상태이고, 그만큼 가슴을 앞으로 활짝 내민 체형에 허리 부위는 섬세한 곡선을 그려내고 있다. 한마디로 그 앙증맞은 몸집은 전체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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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문 미학적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열 살 남짓한 소녀의 햇빛에 알맞게 그을린 몸매는 우동(Houdon)의 디안(Diane)을 콜라스(Collas) 축소판으로 재현한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아이들의 모습에 대한 이와 같은 인류학적 관찰 결과, 조선 사회의 중간 계층 정도의 아동은 퉁구스 족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나중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일부 상류계층과 최하계층의 아동과도 매우 다른 특징으로 보인다.

 수로를 통한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계속해서 육로로 진행했다. 강의 양안에 죽 이어져 있는 구릉들의 중턱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저 밑에서 흐르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흐르는 강물은 언덕 옆구리에 튀어나온 바위들에 부딪칠 때마다 하얀 포말을 뿜었다가는 다시 삼켰다. 밤이 왔고, 우리는 한치만 헛디뎌도 저 아래 차가운 물 속으로 곤두박질칠 만큼 비좁은 오솔길을 횃불로 밝히며 나아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나 걸었을까.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낙동강 유역을 벗어나 다시 평야지대로 들어섰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그날밤 쉬어 갈 마을에 당도했다.
 다음날부터는 계속해서 모래동이, 동해, 장내, 남장모란을 경유하여 감통 고개를 따라 호곡내로 들어가 앞서 얘기한 구릉지대로 둘러싸인 평야를 가로질러 갔고, 내친 김에 칠곡이라는 도시를 통과했다. 쌓인 피로로 전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견디다 못한 나는 호위병사 한 명과 마부 한 명을 먼저 보내, 혹시 우리의 도착이 늦어지더라도 들어갈 수 있게 양해를 구한다는 서한을 대구의 행정책임자에게 전하도록 시켰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 시간쯤 지나 우리는 옷이 갈기갈기 찢긴 병사를 따라잡게 되었는데, 그와 동행했던 마부는 땅바닥에 마치 죽은 듯이 꼼짝 않고 뻗어 있고, 주위로 몇몇 조선인들이 어떻게든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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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정인즉 이러했다. 먼저, 술이 얼큰하게 취한 마부가 병사의 지시를 거부했다. 싸움이 벌어졌고, 군인에게 시비를 건 죄가 크다는 것을 잘 아는 마부는 엉겁결에 기절한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박을 잡아 본 나는 별 이상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열을 향해 즉시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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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무 이의 없이 일사천리로 따라 주었고, 그로써 나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한 번 인정된 권위란 여간해서는 무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아니, 무시는커녕 거의 숭배의 대상이 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마을이면 마을, 도시면 도시마다 그 주민들이 으리으리한 복장을 한 현지 관리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그토록 많은 기념물들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라!
 그 중에 일부는 매우 작은 규모이면서도, 그럴듯한 지붕과 버팀벽을 갖춘 일종의 작은 사당이라 할 만한 것들도 있고, 가로 세로가 20에서 60센티미터 되고 활자가 새겨진 단순한 주철(鑄鐵)로 만든 비들도 있다. 그 중 많은 것들이 무척 오래된 것이었는데, 이는 옛날 어느 시대에 조선의 금속 공법이 얼마나 발전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그밖에도 저 중국의 사신이 조선을 여행하면서 쓴 기록에 의하면, 이 나라의 철탑 공법이란 우리 프랑스의 에펠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사소한 사건 때문에 우리의 여정은 자꾸만 지체되었다.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을 건너자마자 어둠이 내렸고, 현지 관찰사에게 미리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굳게 닫힌 대구 관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에 봉착했다. 하는 수 없이 도시 문 밖의 어느 허름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내가 잘 방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방보다도 끔직했다. 대표적으로 한 가지만 흉을 보자면, 천장의 들보란 들보가 모조리 두터운 거미줄로 휘감겨 있었다. 그걸 치우고 자는 게 어떠냐는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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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었지만, 나는 공연히 거미군단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놔두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다들 피곤했던지 더 이상 권하지도 않았다. 말들 역시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여물도 마다한 채 죽은 듯이 잠만 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말들은 그렇게 널부러진 상태 그대로였고, 내가 보기엔 3천 미터가 채 안 돼 보이는 산들을 넘느라 죽을 고생을 한 일행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람들을 아예 한나절 그렇게 누워 쉬도록 해주고, 내 공식 신분증을 대구 관찰사에게 보냈다.
 잠시 후 대구 관내에서 파견된 의장병이 편지 한 장을 들고 왔다. 내용인 즉, 간밤에 성문을 열어 주지 못해서 죄송하며, 대신 낮에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환영할 것이고, 관아에 숙소를 마련함은 물론, 가능한 모든 편의를 배려해 주겠노라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통역관에게 답장을 쓰도록 지시했다. 그토록 친절을 베푸시니 각하께 감사를 드리는 바이며, 당연히 초대에 응해 뵙는 영광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편지에 서명을 하고 의장병에게 들려 보낸 다음, 부랴부랴 가방을 뒤져 연회 복장을 찾았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그 동안 숱한 강과 개천을 건너는 동안 윗도리며 조끼, 바지 할 것 없이 무사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이곳의 관찰사가 한양에서 열린 유럽인 주최 공식 리셉션에도 참석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는, 가능하면 정식 복장을 갖춰 입고 싶었다. 서둘러 옷을 입은 다음 커다란 손거울로 이리저리 비춰 보니 돌돌 말린 바지며 소매하고, 서로 철천지원수지간처럼 제멋대로 뻗쳐 있는 옷자락들이 정말로 가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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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나마 셀룰로이드로 만든 와이셔츠 앞가리개와 커프스만은 그런대로 제법 반들거렸다. 결국 전적으로 그것들만 믿기로 마음먹은 나는 겨드랑이에 오페라햇을 끼고 고개를 세운 채 당당하게 방을 나섰다.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검은 정장차림을 놀란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펼쳐 쓰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모자 하면 세계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모델이 존재하는 이 모자의 나라에서조차, 내 것과 같은 모자는 처음 보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오, 나의 오페라햇이여! 진정학라… 나는 관에서 내어준 가마 속으로 서둘러 들어가 앉아 이 사람들의 거북한 시선을 피했다. 여덟 명의 가마꾼이 번쩍 가마를 들자, 내 두 명의 호위 병사가 앞서고 다른 일행은 뒤를 따르면서, 관찰사가 보내 준 다른 위병들의 인솔 하에 드디어 여지껏 어떤 유럽인도 들어가 보지 못한 대구라는 도시로 들어섰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몰려들었지만 어떤 적의도 섞여 있지 않았다. 우리가 관아에 도착하는 순간, 그곳으로부터 한 지역 관리가 가마꾼들의 걸쭉한 고함소리로 길을 트면서 막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관아의 전정을 지나 다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 답답한 가마에서 해방된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하는 사람이 한양에 있는 궁궐 접견실의 축소판이라 할 만한 장소로 정중히 안내를 해주었다.
 으리으리한 의자에 앉아 있던 관찰사는 내가 들어서자 즉시 일어났다. 우리 둘은 서로에게 유럽식으로 인사를 건냈고, 잠시 선 채로 편지에서 했던 말들을 의례적으로 되풀이했다. 그는 내게 널따란 매트에 앉도록 권했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곧 내놓겠다고 말했다. 즉각, 각자의 앞에 네 개의 작은 탁자가 놓여졌고 이상야릇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모든 음식이 우아한 자기 그릇에 담겨졌는데, 그 크기는 중국이나 일본의 것보다 훨씬 컸다. 나는 음식의 아름다움과 완벽한 양념, 알맞게 요리된 고기맛 등등에 대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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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으로 감탄의 찬사를 늘어놓는 걸 잊지 않았다. 이어서 당과류와 과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찬사가 절로 나올 만한 쌀로 빚은 곡주가 나왔고, 나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상감마마를 위해 건배를 제의했다. 관찰사 역시 프랑스를 위한 건배로 그에 화답해 주었다. 곡주의 맛이 기가 막혔기 때문에, 나는 또 잔을 채워서 이번엔 관찰사 각하와 그가 존경하는 아버지처럼 다스리는 이 지역을 위해서도 건배를 했고, 그 역시 질세라 자신의 건강과 나의 원만한 여행을 위해 잔을 들었다. 간식이 대충 끝나자 우리 둘 사이에 보다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내 통역관이 바쁘게 서로의 말을 전달하는 가운데, 나는 이토록 친절하게 맞아 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동받았다는 뜻을 충분히 전했다. 그도 나처럼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식 파견된 저명한 학자를 맞이하게 되어 매우 영광이라는 말과 함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용기를 내어 감행하는 이러한 여행에 반드시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겸손한 태도로 감사의 표현을 한 뒤, 왕국의 백성들에게서 그 동안 보아온 성실함과 산천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다는 말과 더불어, 특히 풍부한 관개시설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농업을 보건대 조선의 백성은 아시아 여타 민족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올해는 날씨가 영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 데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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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보시다시피 기근이 시작되고 있어요.”
 “언젠가는 각하께서 바라시는 것처럼, 우리 유럽에서와 같이 이곳의 기근 문제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순간 그곳에 함께 있던 수행원들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유럽에는 기근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요?”
“우리도 옛날에는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기근에서 탈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좌중에 동요가 일었다.
 “그렇다면 햇빛과 구름, 바람 등등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가 있다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각하! 다만 기근이란 동시에 전 지역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기에, 운송 수단만 원활히 가동된다면 기근 피해가 없는 지역으로부터 식량이 딸리는 지역에 적절히 도움을 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엔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가마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아주 빨리 운송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보다시피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나라에서 그런 걸 무슨 수로 움직인단 말이오?”
 이번에는 동의를 표현하는 수근거림이 여기저기서 일었다.
“무척 송구스런 말씀입니다만, 만약 우리 프랑스 기술자들을 불러 적절한 작업만 수행하신다면 각하께서 방금 언급하신 난점들조차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휘돌았다.
“네, 뭐라고요?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아주 쉬운 일이지요. 귀국의 왕께서 원하신다면 나라 전체를 단 몇 시간 안에 산 위로든 산 밑으로든 오고갈 수가 있게 할 것입니다.”
이내 감탄의 탄성이 이곳 저곳에서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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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감히 말씀드리자면 산 위보다는 산 밑으로 지나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지만 말입니다.”
더더욱 놀라는 분위기였다.
“알겠소. 유럽인들은 과학의 달인들이니, 그대들을 불러들이는 일에 대해 앞으로 우리 모두 연구해 보리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 스스로 과학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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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각하, 일본이 했듯이 하십시오. 젊고 똑똑한 인재들을 저희 나라에 보내시어 이곳에 알려져 있지 않은 학문들을 공부해 돌아와 전파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최근 맺어진 양국의 우호관계를 돈돈히 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분명 대단한 흥미를 느꼈을 관찰사는 내게 관아 내에 머물 것을 강력히 권하면서도 방도 여러 개 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다음날이면 다시 길을 떠나야만 하며, 관아에 그처럼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고 점잖게 사양했다. 그는 계속 붙잡았지만, 나 또한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호의를 사양했다. 마침내 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접견은 그것으로 끝났다. 내가 다시 가마에 올라탔을 때는 나를 위한 호위 인원이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마치 일등급의 관리가 된 듯이 말이다!
우리는 그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도시 내부를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나에게 성벽 위에서 한 번에 조망할 기회를 주기 위해, 행렬이 성의 순시로(巡視路)를 돌았는데, 그 길은 베이징 성에 있는 것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는 똑 같은 규모의 요새화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의 내부는 과거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글귀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가을의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더 멀리 눈길을 돌리자, 주위를 마치 띠처럼 에워싸고 있는 구릉들이 푸르스름한 하늘 속으로 반쯤 사라져 가기라도 하듯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양의 강렬한 햇살은 고산 준령을 넘는 가운데 우리를 고생시켰던 싸늘한 공기와 기분 좋은 대조를 이루며 온누리를 가득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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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발치 가까이 시선을 떨구자, 대도시의 온갖 거리들과 광장∙기념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일반 민중이 사는 구역에는 짚으로 엮은 지붕들이 빽빽했으나 도시의 중심구역, 그러니까 귀족들의 거주지역에는 용마루에서 처마 끝까지 직선과 곡선의 기막힌 조화를 펼치는 기와지붕들이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멋진 지붕 양식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어를 가르치는 학교 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관아 건물이었다. 관아에 딸린 여러 건물들 중에서도 또한 그 규모에서 압도적인 것이 방금 내가 나온 접견실 건물인데, 다채로운 색깔이 돋보이는 그 지붕 꼭대기에는 관찰사의 거대한 붉은 깃발이 도시 전체를 굽어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구였다. ‘거미군단의 여관’에 돌아오자, 다시 한 번 관아에 머물 것을 청하는 각하의 심부름꾼이 벌써부터 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사양의 편지를 썼고, 아마 좀 실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식대로 살기 위해 부득불 조선식의 예법을 요구하는 수준을 애써 비껴갔다. 바로 그날 저녁, 관찰사로부터 닭이며 달걀∙과자∙사탕∙감 등등의 선물이 쇄도했다. 다시 또 한 번 감사의 편지를 보내자, 결국 나를 놓아 주며 좋은 밤을 보내라는 화답이 전해져 왔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내 말들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천만 다행하게도 녀석들은 이제 당당히 일어서서 그 맛 좋은 강낭콩 수프를 한창 신이 나 우물거리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중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내 지도력을 굳건히 믿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가지말라 해도 기필코 부산까지 동행할 자세가 갖추어 있는 듯했다. 나는 위풍당당한 복장의 의장병이 성문을 포함한 도시의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둘러본 다음, 이 대구라는 도시에 대해 만족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사실 한양의 궁정이 상중(喪中)만 아니었어도 여러 답답한 예법과 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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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 관찰사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아마도 관내에서 베풀 온갖 여흥과 잔치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거기엔 아마도 조선의 음악과 갖은 잡기들, 전문적으로 훈련된 여성들이 추는 춤사위, 그리고 연극 등등이 포함되리라. 비록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에게 그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하기 위해 여기 약간의 삽화와 더불어 그런 잔치를 보고 쓴 문헌의 한 대목을 발췌해 소개할까 한다. 출처는 미국의 주한 공사 서기관인 퍼시벌 로웰시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책으로, 보스톤에 소재한 틱노르 사에서 출판되었다.
 무척이나 재기발랄했던 저자는 한양에 체류하는 동안 몇몇 유럽인 동료들과 함께 근방의 사찰을 찾아가 품격높은 조선식 잔치를 벌이곤 했었다.

 화창한 아침, 우리는 유럽식으로 지내는 데 필요한 짐들을 꾸려 하인에게 들리고, 몇몇 기생들과 약사들, 광대들을 대동하고 몇 필의 말과 더불어 길을 떠났다. 한양을 둘러싼 멋진 평야를 흥겹게 건너, 우리의 목적지는 산 속에 있는 어떤 사찰, 즉 몇 채의 중요한 부속건물들 말고도 소박한 탑이 둘 있는 사찰이었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 중국에서처럼 망치로 고정된 종을 두드리는 식으로 경내 전체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번을 긴 간격을 두고 종이 울리면 곧 예불을 드린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가장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여러 형상들과 북∙조화(造花)들∙괴상하게 생긴 향 막대들, 그리고 거대한 목조 물고기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열두 명의 승려들은 근엄한 복장을 한 채 노래를 부르면서 끊임없이 원을 돌고 있었고, 한 초심자가 제단 앞에 꿇어앉아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염불 내용은 그런 땡중들이 알 리 없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앞을 지나치면서 좀 겸연쩍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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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살짝 웃었다. 의식은 제단 위에 쌀과 과일, 그리고 수련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곧장 나온 우리는 구내 식당으로 향했다. 상을 차리는 기생들은 마치 영양(羚羊)처럼 고분고분 우리한테 익숙해져 갔다. ‘매향(梅香)’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내 귀에다 대고 제법 나긋나긋하게 일본말로 몇 마디 속삭이기도 했는데, 그 애틋한 느낌이 마치 가슴 속내 얘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녀의 교태어린 자태는 우리를 놀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듯한 승려들과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귀여운 여자가 아닌가! 그녀의 매력적인 웃음 속에 푹 파묻혀 내가 외국인이며, 조국에서 이천 리나 떨어진 나라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데, 누군가 어서 공연할 준비를 해야 하니 자리를 정리하자고 보채는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방 한구석에 마련된 돗자리와 방석 등에 자리를 잡았다. 악사들이 앞에서 원을 그리고 앉아 저마다 악기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시 후면 배우 역할도 겸할 터이다. 그 주위로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들어 실로 얼굴의 물결처럼 넘실댔다. 그 표정들 속에는 놀라움과 호기심, 기대감, 그리고 뿌듯함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제일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벽에 딱 붙어 있어야만 할 정도로 방안은 꽉 차 있었고, 입구까지 사람들로 막혀 있었다. 가뜩이나 색색의 등불 세 개가 어스름한 불빛을 비추는 데다가, 담배 연기까지 가세해 이 묘한 분위기를 더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북돋우고 있었다. 방 저쪽 구석에서는 까까머리에다 밤색 법의를 걸친 승려들이 길다란 염주를 목에 걸거나 삼베 허리띠에 늘어뜨린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아직 해맑은 표정의 나이 어린 수련승들 역시 자기가 누구이며 어디 있는가도 잊은 듯한 얼굴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데려온 하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다채로운 복장들과 검은 펠트 모자는 승려들의 허름한 옷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듯 한 장소에 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이 빽빽이 운집해 있다 보니,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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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친절한 환대에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고, 그 역시 무사한 여행길을 빌며 호화로운 행렬로 배웅해 주면서 다음 기착지에서 차질없이 점심식사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시해 놓았다고 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모든 호의가 나의 개인적 가치 때문이라기보다는, 비록 평범한 학자일지라도 내가 속한 프랑스라는 나라의 위상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가 나중에 파리에 돌아온 후 조선에서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몇 가지 기념품들을 보냈을 때, 그에 대한 답례로서 이 관찰사가 우리의 외교관을 통해 또다시 소중한 선물과 편지를 보내온 것은 정말이지 조선의 예법이 얼마나 철두철미한가를 증명해준다. 여기, 예법을 갖춘 조선의 편지 글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실례가 있어 소개한다.

   “기축년 둘째 달 초나흗날에 경상도 지방 관찰사인 김강진이 콜랭 드플랑시 씨에게 보내는 답신.
작년에 세계여행을 하던 바라 씨가 영광스럽게도 저희 도시를 방문해 주신 바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처음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방문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지금까지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다정한 여행가께서 내게 두 장의 양탄자를 선물로 보내온 것입니다.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와 보낸 게 분명한 이 선물을 보며, 저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호의는 호의로 갚는 게 우리의 예법이자 정서입니다. 따라서 여기 질 좋은 대나무발 넉 장을 골라 바라 씨께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하오니, 수고스럽지만 각하께서 이 물건들이 온전히 수취인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적당한 조치를 취해 주시고, 아울러 저의 심심한 감사의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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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전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면 일전에 저에게 해주신 각하의 과찬의 말씀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이만 글을 줄일까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이 편지가 씌어진 바로 다음해에 그 친절한 관찰사의 사망 소식과 함께, 한양에서 그토록 환대해 주었던 블랑 예하와 세네갈에서 오신 수녀님의 사망 소식까지 한꺼번에 접하게 된다.
 어쨌든 나는 다시 여행용 옷차림으로 돌아갔고, 이번엔 행렬도 자못 화려해진 만큼 관례에 준하게 대열의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1백여 명은 족히 되는 관찰사의 하인들이 녹∙청∙적색의 화려한 비단 위에 검은 혹은 흰색 얇은 천을 드리운 눈부신 복장을 하고 나를 호위했던 것이다. 해맑은 아침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의상들 속에 파묻힌 우리의 가엾은 조랑말들은 영 눈에 익지 않은 주위의 화려함 때문에 주눅이 든 듯했다. 우리는 그렇게 도시 한복판을 행진했고, 그 요란한 출발 광경을 보려고 사방에서 몰려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마침내 들판으로 나가 몇 킬로미터쯤 갔을 때였다. 위풍당당한 행렬을 유지하며 약간 비탈진 길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끔찍한 행진 나팔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어대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날카롭고 기괴한 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였기에, 우리는 마치 최후의 심판이라도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질겁한 말들은 일제히 앞발질을 했고, 그 바람에 말을 탄 사람 네 명이 낙마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재수 없게도 발이 등자(鐙子)에 걸린 채 한동안 질질 끌려갔다. 심지어 나를 호위해야 할 병사 한 명이 극심한 공포에 질려 허둥대는 참에, 재빨리 몸을 날려 반쯤 떨어지려는 그를 붙든다는 게 그만 내 쪽에서 보기 좋게 낙마를 하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성공 뒤에는 가끔 실패가 오는 법’이라는 격언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일어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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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혼비백산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말들을 잘 붙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사태는 이내 수습되었고,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여지없이 구겨져 버린 위신을 만회할 겸 나는 내 말의 헐렁해진 뱃대끈 사이에 손을 넣으면서 그것을 충분히 조여 놓지 않은 마부를 나무랐다. 그리고는 체면을 되살리기 위해 결사적으로 얼른 말에 올라타려 했지만, 내 복장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녀석이 냅다 뒷발로 일어서는 바람에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이 얄궂게도 두번째 난동을 부리려는 찰나, 나는 날렵하게 올라타는 데 성공했고, 그걸 본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사실 조선 사람은, 특히 지체 높은 공무원일수록 형편없는 기수(騎手)가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의 재갈과 꼬리를 연결한 가느다란 가죽띠를 네 명의 마부에게 각각 맡겨서 조종하게 하고, 자신은 그저 점잖게 말 등에 올라타 있기가 일쑤니 말이다.
 아무튼 대열이 다시 정비되자 통역관이 내게 나팔소리를 중지시켜야 할 지 물었다.
 “늘 그렇게 나팔을 부는가요?”
 “네.”
 통역관의 대답이었다.
 “정 그렇다면 나팔수들이 지금처럼 대열 뒤에서 불지 말고 아예 앞쪽으로 가서 의식에 따라 불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문제의 나팔들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전부 펼치면 크기가 1미터20센티가 되기 때문에, 앞에서 기수가 그것을 불 준비를 하는 동안 뒤에 따라가는 우리들은 말고삐를 단단히 붙들고 만반의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온갖 허세를 부리며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계속했고, 마침내 관찰사 각하가 점심을 약속한 마을에 도착해서 푸짐하게 허기를 채웠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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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까지 분에 넘치게 호위해 오던 인원들은 그제서야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되돌아갔다. 아마도 그날 저녁 내로 다시 관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원래의 인원은 익숙한 순서로 다시 대열을 정비했고, 대구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가 묘사한 것과 유사한 풍경 속에서 남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한참을 가는데, 기근이 시작되고 있는 나라에서 오갈 데 없어 보이는 열두어 살 정도의 고아 소년 하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마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보아 하니 귀여운 데가 있고 활달한 것 같아서, 그때부터 내 말을 돌보게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빗물로 침식된 작은 언덕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모래가 많은 광대한 지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 역시 대부분의 경작지와 마찬가지로 관개시설이 효과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서, 옛날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음에도 지금은 각종 수확물을 거둘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잠두열매, 강낭콩, 온갖 야채와 과일, 뭐니뭐니 해도 감나무와 뽕나무 재배가 성행해서 누에게 상당량 길러지고 있었다.
 우리는 꽤 높은 고개를 건너 해질녘이 되어서야 총안이 조밀하게 뚫린 청도라는 도시의 성벽 앞에 당도했다. 이중으로 요새화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만한 장소에서 흔히 보듯 위병이라든가 상인이나 행인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쥐 죽은 듯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에는 잡초가 여기저기 돋아나 있었고, 행렬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구경 나오거나, 심지어는 꼭꼭 닫힌 집의 문짝조차 열어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나마 졸고 있는 사람이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나오는 성채보다 더했다.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이곳이 혹 유령 도시는 아닐까 생각하는데, 마침 개 한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갔다. 뿐만 아니라 저녁 어스름 속, 종이로 바른 몇 안 되는 창문에서 멀찌감치 희미한 불빛이 느껴지기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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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는 도시로 들어갔던 반대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다음에도 한동안, 마치 그 안의 침묵에 전염이라도 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그 이상한 도시를 힐끗 바라보았는데, 순간 흡사 유령에 홀리기라도 한 듯 성문이 슬그머니 닫히는 것이었다. 그날밤 묵은 마을에서 들은 얘기로는, 사실 그 유령 도시가 최근에 콜레라의 피해를 입어 거의 폐허나 다름없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끔찍한 전염병은 온 나라를 꽤나 자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앞에서 조선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천연두 마귀를 달래는지 알아 본 바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질병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는 것 같다. 즉 직사각형의 작은 탁자에 특별히 온갖 음식을 차려 놓고 양끝에 화병을 놓은 다음, 남녀가 그 앞에 앉아 북을 치고 방울을 흔들어대면서 병마(病魔)를 불러 진수성찬을 들고 화를 푸시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콜레라의 마귀에게만은 다소 이색적이고도 적대적인 방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단순히 집 대문에다 고양이 그림만 달랑 붙여 놓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 이유인즉슨, 콜레라와 경련이 쥐가 물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쥐가 무서워할 게 고양이밖에 더 있겠냐는 식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하늘은 처음으로 잔뜩 찌푸려 있었고, 나는 부랴부랴 대열을 정비해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이내 쾌청한 날씨가 회복되었고, 모두 기분이 명랑해지자 어김없이 내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습관이 굳어지게 된 데에도 연유가 있다. 사실 나는 탐험을 할 때 원칙이 있는데, 특히 출발할 때 매우 엄격한 태도로 일행을 닦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리더의 권위가 단단히 서야 전체 여정이 무사히 진행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렇게 일단 기틀이 잡히고 나면, 일행 모두에게 얼마든지 호의를 베풀며 대열을 이끌어갈 수가 있는 법이다. 실제로 우리 일행은 리더인 나에게 무척 흡족해 하고 있었으며, 매일 자신들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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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 서 있었다. 또한 수많은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중앙에 두세 개의 사찰과 공공건물들이 다채로운 기와지붕을 이고 서 있었고, 군란 밑으로는 반쯤 부서져 내린 방벽들이 이끼에 뒤덮인 채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굽어 보는 드넓은 평야에는 여기저기 다양한 덤불숲들이 자라고 있었고, 주위로는 무수한 들꽃이 만개해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를 희디흰 금속성 빛을 발하는 강의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고도(古都)의 내부로는 고고학적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구경거리가 그득했다. 거리며, 기념물들이며, 일반 가옥들, 그 중에서도 특히 귀족의 집들이 대부분 폐허나 다름없으면서도 중요한 특징이 있어서 무척 독창적인 스타일을 드러내고 있었다. 섬세하면서도 기기묘묘한 선들은 예부터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곳 특유의 건축술이 존재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술적으로 여러 시대의 흔적이 그토록 훌륭히 보존되고 있는 밀양이라는 도시는 내가 보기에 조선의 뉘른베르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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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식 식단-미학적 명상-견공의 신세-밀양을 떠나며-논 풍경-노인공경-조선인과 일본인-개울가 풍경-중가뫼 고개-일본식 여관에서-대열을 해산하며-담배를 피우는 일본 아가씨-유럽인들과의 해후-네 개의 부산-동해안을 따라서-원산과 독원-호랑이들-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의 조선인-대한해협의 태풍-나가사키-맺음말

 우리는 곧장 근처 주막에 여장을 풀었다. 밀양은 중요 지역의 중심도시였기에, 나는 즉각 조선 내(內) 신분증명서부터 그곳 관리에게 제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관리는 지금 자리에 없었고, 대신 일을 맡아 보고 있는 지역 유지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유럽식 먹거리를 조금 내놓았다. 그는 무척 흡족했는지 누가 음식맛을 칭찬했고, 자신의 아버지가 와병중이라 집에 초대하지 못하는 것을 거듭 사과했다. 그날 저녁 그 귀족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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