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알기/달서구

달서구 지명 유래 4 - 성서(城西), 송현동(松峴洞), 신당동(新塘洞)

종영 2012. 2. 29. 15:55

 

달서구 지명 유래 4 - 성서(城西), 송현동(松峴洞), 신당동(新塘洞)

 

 

성서(城西)

    이 지역은 본래 대구부 성(城) 서쪽이 됨으로 성서면이라 하여 10개동(파산, 파호, 금회, 호림, 신당, 이곡, 율제, 용상, 용하, 죽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에 12개동(파산, 파호, 호림, 신당, 이곡, 용산, 죽전, 갈산, 장동, 장기, 본리, 송현)으로 개편되면서 달성군에 소속 되었다.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달성군에 환원되었다.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시에 달성군 성서읍 일원에서 새로 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신설된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1982년에 성서출장소 3개 행정동을 설치하여 운영하다가 1989년에 성서 2동이 2동과 4동으로 분리되었다.

    행정동으로는 성서이지만 파호, 파산, 호림, 신당, 이곡, 용산, 죽전, 갈산, 장동, 장기, 본리, 송현의 12 개동이 속해 있다.   

 

  

송현동(松峴洞)

    원래 이지역은 솔고개가 있었기 때문에 송현(松峴)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본래 대구부 감물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함에 따라 매자동과 취령동, 구암리를 합하여 송현동이라 하였다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1957년에는 대구시에, 1963년에는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1981년 달성군 월배읍 송현동이 대구직할시 남구 송현동으로 편입되었으며 1986년에 송현 1, 2동으로 분리되고 1988년에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신당동(新塘洞 : 오정동, 점터) 

오정동

   1456년(세조2년)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사육신과 함께 순절한 분 중에 백촌 김문기있다.

   그의 7세 손 김응수의 부인 동래 정씨가 임란시인 1592년 고십골(고십은 꿀밤나무를 말함-꿀밤나무가 많아 고십골이라 했으며 신당 북서편 골짜기임)에서 고십잎 속에 숨어 있다가 뒤따라온 왜적의 칼에 찔려 흐르는 피를 치맛자락으로 닦으며  쓰러진 곳이 이곳 오정동이다.

   이곳 정자에는 회나무가 5그루 서 있었으나 현재는 찾을 수 없다.

   1910년부터 해마다 당산제를 올리고부터 신당으로 부른다고 하나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점터

   1778년경, 인동 장순덕씨 가 점을 쳐서 정한 자리라 하여 점터라 불리어졌으며, 그후 전주 이씨가 이주하여 왔으나 자손이 많이 번창하지 못하고 오직 인동 장씨의 후손만이 번창하여 장씨터라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