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十景] ①금호강 뱃놀이
[大邱十景] ①금호강 뱃놀이
大邱十景을 노래한 徐居正의 七言絶句 十首가 傳해오고 있다. 원래 十詠인 것을 大丘十詠, 大丘十景, 達城十詠, 達城十景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大丘로서의 邑城이 축조되지 않았고 達城(현재의 달성공원일대)이 그 堡障이 되어 慶尙道都觀黜陟使가 巡察할 때며 大丘邑에는 知郡事를 두고 있던 때이다. 일찍이 達城이 達城徐氏의 世居地임을 지금의 달성공원 경내에 1971년에 세워진 達城徐氏遺墟碑가 그 來歷을 말해주고 있다.
徐居正(서거정, 1420-1488)의 字(자)는 剛中(강중), 號(호)는 四佳亭(사가정) 또는 亭亭亭(정정정)이다. 世宗(세종) 2년(1420)에 태어났고 太宗(태종)의 王工權確立(왕권확립)에 佐命一等功臣(좌명일등공신)인 陽村(양촌) 權近(권근)의 外孫(외손)이기도 한 그는 世宗(세종) 26년(1444) 式年文科(식년문과)에 오른 후 9代(대) 成宗(성종)까지 6朝(조)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6曺判書(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과 左贊成(좌찬성)에 佐理功臣三等(좌리공신삼등)으로 達城君(달성군)에 封(봉)해지고 諡號(시호)는 文忠(문충)이다. 그의 학문은 天文(천문), 地理(지리), 醫藥(의약), 卜筮(복서), 星命(성명)등에 능통한 대학자로 海東(해동)의 奇才(기재)라 일컬을 만큼 국가의 高文大冊(고문대책)이 거의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歷代年表(역대년표), 經國大典(경국대전), 東國通鑑(동국통감), 筆苑雜記(필원잡기), 東文選(동문선), 新撰輿地勝覽(신찬여지승남), 四佳集(사가집)등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
大邱의 十景은 成宗 12년(1481), 王命에 의해 盧思愼(노사신)등이 중국 明(명)나라의 大明一統誌를 본 떠서 만든 各道의 地理誌인 東國輿地勝覽을 中宗 25년(1530)에 역시 왕명에 의해 보완하여 증보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大邱는 이른바 內凌盜地로 新川을 軸으로 하여 北東部의 八公山 줄기와 南의 最頂山 및 琵瑟山줄기로 둘러 싸여 있고 西쪽으로 약간 트여 있는 나팔모양을 하고 있다.
新川은 비슬산 줄기에서 發源하여 南部山地의 谷口인 嘉昌에서 龍頭부리(용두방천)를 거쳐 시내로 들어 와서 배나무 샘(지금의 梨泉桐(이천동)과 水道山(대구수도관리소가 있는 산, 기린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기린산이라 했음) 동쪽 기슭을 스쳐 건들 바위를 지나 이곳에서 한바퀴 돌아 깊은 물 구비를 만들고 다시 連龜山(제일여중이 있는 산), 蛾眉山(대구 향교가 있는 산, 모양이 나비눈썹 같다고 하여서) 밑으로 해서 東山(신명여고 일대의 산)을 지나 달성공원 앞으로 해서 날뫼(飛山洞, 비산동)으로 하여 達川(達西川, 달서천)으로 흘러 八達津(팔달교부근)에서 琴湖江과 合流하던 것을 正祖 1년(1777)에 大丘判官으로 부임한 이서가 1778년에 사재를 들여 해마다 겪는 대구지방의 물난리를 막고자 물길을 지금의 新川으로 돌렸고 新川을 현재의 백사부리(서변잠수교와 침산교부근)에서 琴湖江으로 流入되게 하였다.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3년후인 1797년에 李公堤碑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매년 1월 14일에 대백프라자 부근인 중구 봉덕 1동 655번지의 新川 堤防(새내뚝)에 移建된 李公堤碑閣에서 방천시장 번영회가 중심이 되어 祭(제)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 新輿覽이라 약칭함)의 山川條에서 笠巖(삿갓바위)을 「在新川中其形如笠故名‥‥‥」이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新川은 무엇이며 248년 후인 正祖 2년(1778)에 判官 李淑이 私財를 들여 대구의 수로를 변경하여 당시 교동에 있었던 孔子廟(향교)의 侵水 위험까지도 막았다던 新川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다. 新川이 되기 이전의 내 이름을 알길 없어 1778년 이후의 新輿覽의 重刊 과정에서 이미 굳어진 新川으로 改字했는지 아니면 1530年의 新輿覽에서도 대구의 수로를 변경한 적이 있어 新川이라고 하였고 그 후의 李判官의 수로 변경도 新川이라고 아울렀는지, 아니면 「새내」의 뜻에서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나마 大邱十景이 있었기로 근 500년전의 大邱風光이 어떠했으리라고 나름대로 그 情景을 그려볼 수 있게 됨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대구를 관광의 불모지라고들 한다. 유쾌하지 않은 그 말처럼 지난 유니버시아드나 월드컵 대회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구를 찾는 관광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관광산업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효과는 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다소 낡은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엄청나다. 하지만 관광의 불모지라는 말이 함의하는 볼거리 없고 갈 곳 없다는 우리 도시 대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 또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자원 경관으로 활용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곳곳에 많다. 대구 십경은 조선 초기 四佳 서거정의 칠언절구 10수를 통해 그 당시 대구의 자연풍광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귀한 사료다. 서거정이 꼽은
제1경은 琴湖泛舟, 즉 금호강에 조각배를 띄워 오가는 물새와 노니는 뱃놀이였다.
[大邱十景] ①금호강 뱃놀이
琴湖淸淺泛蘭舟(금호청천범난주) 금호강 맑은 물에 조각배 띄우고 取此閑行近白鷗(취차한행근백구) 한가히 오가며 갈매기와 노닐다가 盡醉月明回棹去(진취월명회도거) 달 아래 흠뻑 취해 뱃길을 돌리니 風流不必五湖遊(풍류불필오호유) 오호가어디더냐이풍류만못하리
▲ 금호강 동촌유원지 뱃놀이. 대구의 볼 만한 경치는 어디일까. 과거에는 어떤 곳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서거정(1420~1488) 선생은 약 500년 전에 대구의 아름다운 풍광 10곳을 대상으로 지은 칠언절구 10수로 대구십경(大邱十景)을 노래했다. 대구십경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 등에 수록돼 있는데, 김택규·박대현 편역의 ‘대구읍지’를 참고해 대구십경을 10차례 에 걸쳐 더듬어 본다. 금호강 맑고 얕은 물에 놀잇배 띄우니, 이다지 한가롭고 백구에 가깝도다. 한껏 취해 달 밝을 제 노 저어 돌아가니, 오호에서 놀아야만 풍류 있는 건 아니로다. 금호강 달빛 아래에서 한가롭게 뱃놀이하는 풍광을 대구의 제1경으로 보았다. 시상의 매개 체인 금호강, 놀잇배, 백구, 달, 오호(중국에 있는 호수) 등으로 서정적 향취가 흠뻑 묻어난 다. 그런데 백구는 바다에 주로 서식하는 갈매기로, 내륙분지인 대구 금호강까지 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요즘 금호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백로나 해오라기를 잘못 표현한 것으 로 판단된다. 금호강의 지명 유래는 몇 가지 있으나 필자는 금호강변 갈대에 부딪히는 바람소리가 마치 가야금을 뜯는 소리와 같아 ‘금(琴)’이라 하고, 유속이 완만한 호수와도 같이 잔잔한 강물이 라 해서 ‘호(湖)’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금호강은 대구의 팔공산, 동화천, 비슬산(앞산), 신천을 남북으로 서로 이어주는 중심 생태 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금호강변에는 흐르는 물에 의해 깎여 형성된 하식애가 곳곳에 수려 한 경관을 형성한다. 주변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러한 곳에는 예로부터 정자와 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동촌의 아양루와 강창의 정자, 그리고 화원유원지 하식애의 상화대 등이 그러한 곳이다. 특히 하식애는 보는 이의 정서함양에 큰 도움을 주고 있어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 이상의 귀중한 자산이다. 서거정 선생은 이러한 금호강의 풍광에 조각배를 타고 놀이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도 좋아보 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풍광을 자아낼 만큼 여유롭고도 수려한 곳이 어딘지를 생 각해보자. 현재 놀잇배가 있는 동촌유원지, 과거 나루터가 있었던 사문진나루터나 검단나루 터, 팔달진나루터, 강정나루터 등지가 배를 띄워 한가롭게 놀이를 하기에 적당하리라 판단 된다. 정부의 ‘4대 강 유역 정비사업’ 일환으로 추진 중인 ‘신천·금호강 종합개발계획’에서는 이처럼 대구만이 가지는 좋은 문화지형을 제대로 발굴·복원해 대구의 이미지 제고와 브랜 드 가치 향상에 힘써주길 기대해 본다. 제2경의 입암조어(笠巖釣魚), 대봉동에 있는 속칭 건들 바위 아래 낚시줄을 드리우고 앉은 모습, 그땐 삿갓바위 밑으로 강물이 흘렀다.
금호강 아양교 입구에 있는 아양루~~~
금호강 동촌유원지의 전경~~
화원유원지 상화대와 사문진교~~
금호강의 금빛소리의 주인인 갈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