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알기/대구 이바구

이중섭의 출세작 ‘소’의 산실 대구, 향촌동

종영 2010. 6. 1. 09:18

 

이중섭의 출세작 ‘소’의 산실 대구, 향촌동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

그의 출세작 '소'는 피란시절 그와 절친했던 시인 구상의 권유로 대구에 와서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묵으며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복여관 자리 지금은 헐리고 없다. 이중섭이 묵을 때에는 대구 최고급 여관이었다.

 대구시 중구청이 제작해 붙여 놓은 기념표지

 수시로 나가 구석에 앉아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 왼쪽 비바리라는 간판이 출입문이 있던 곳이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꽃자리다방 ( 국제미공사) 표지화를 이중섭이 그렸다.

 

 

 

 

 

구상 작  '초토의 시'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후보작으로도 올랐다.

 

이중섭의 출세작 ‘소’의 산실

대구, 향촌동

 

다음 달이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엄청난 비극이기도 했지만 국군은 물론 유엔군까지 많은 젊은이가 희생되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대구는 달랐다. 북한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타지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로 들끓었다. 그 때 정비석, 마해송, 조지훈, 장덕조, 박두진, 이덕진, 방기환 , 오상순 김팔봉, 최정희, 최상득, 전숙히, 최태응, 양명문, 최인욱, 장만영, 김이석, 김윤성, 이상로, 유쥬현, 김종삼, 성기원, 등 문인과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대구로 내려와 혹은 종군작가로 혹은 피란살이로 어렵게 보냈다.

절망과 허무감은 물론 생활조차 참담했다. 자칭 국보라고 하던 양주동조차도 아내와 함께 손수레를 끌며 굴비장사로 생계를 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예술가들의 창작의욕은 불타올라 조지훈의 첫 시집 ‘풀잎단장’ 김소운의 수필집 ‘목근통신’ 유치환의 시집 ‘보병과 더불어’는 여류작가 전숙희가 운영하던 향촌동의 향수다방에서, 최인욱의 단편집 ‘저류’는 살으리다방에서 각각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이 때 구상(1919~2004)도 첫 시집 ‘구상’과 사회평론집 ‘민주고발’ 전쟁에 짓밟힌 인간성을 증언 · 고발한 시집 ‘ 초토의 시’를 발간했다.

1955년 초 이중섭(1916~1956)이 대구로 왔다. 구상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소설가 최태응과 함께 당시로서는 최고급이었던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머물게 했다. 서울 출신의 구상과 평양 출신의 이중섭이 원산에서 맺은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상의 시집 <초토의 시> 표지화를 이중섭이 그렸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중섭은 당시 무명작가로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무료한 시간을 대구 향촌동의 백록다방에서 양담배 스트라이크의 내지인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보냈다. 그가 즐겨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은 대구의 명문여고를 졸업한 미모의 두 재원(才媛)이 개업해 집을 떠나 객지에서 외롭게 보내고 있던 뭇 예술가들의 가슴을 조이게 한 곳이다.

그 해 5월 구상은 미국공보원 원장인 맥타가드(훗날 영남대학교 교수 역임)에게 부탁해 이중섭의 개인전을 열었다. 스페인의 투우와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내는 그의 독특한 그림은 미국인 맥타가드의 관심을 끌었다. 몇 작품이 미국에 보내지고 우연한 기회에 ‘소’가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그의 예술성이 국내보다 미국에 먼저 알려지는 계기였다.

전시 후 이중섭의 정신분열증은 더 악화되었다.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에게 ‘저 친구 멍텅구리다. 내 사기에 속았다’ 하면서 비웃기도 하고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다’고도 하며 거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해 여름 서울로 올라가 치료를 받다가 가을에 타계했다. 따라서 대구의 많은 사람들은 경복여관 2층 9호실을 그의 예술의 마지막 산실이라고 한다.

특히 이중섭을 아꼈던 구상은 ‘그는 그림밖에 몰랐다. 때로는 음화(淫畵)를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는가 하면 병상에 누워있을 때에는 병을 낫게 한다며 천도복숭아를 그려 오기도 했다’고 했다.

이중섭이 표지화를 그려준 구상(具常)의 대표작 ‘초토의 시’는 한국인으로는 몇 안 되게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세월은 60년을 흘러 이중섭이 정열을 불태웠던 경복여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를 끝까지 보살펴주며 일약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해준 구상도 가고 없으며, 그가 그림을 즐겨 그렸던 미모의 처녀가 운영했던 백록다방도 문을 닫고 건물만 휑하니 남아 있다.

전쟁의 포연이 자욱하고 허무와 가난으로 끼니까지 거르기도 했지만 창작열만은 실전 못지않게 치열했던 예술가들로 붐볐던 대구의 향촌동도 쇠락의 길을 걸어 이젠 잊혀저 가고 있다.

인근의 장관동 일대에는 소설가 김원일이 어린 시절을 피란민과 더불어 보내며 느낀 바를 작품화한 또 다른 전쟁소설 ‘마당 깊은 집’의 무대이다. 따라서 대구 향촌동 일대는 소위 한국전쟁문학(?)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6, 25전쟁 발발 60 주년, 종군예술가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일대를 국방부가 전쟁문학 기념사업지구로 지정해 전쟁의 아픔과 그 아픔을 온몸으로 이겨 내려한 국가관이 투철했던 그들을 기리고 청소년들에게는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