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철거의 숨은 뜻
● 읍성철거의 숨은 뜻
일본 거류민단이 읍성 철거를 추진한 데는 이 같은 표면상의 이유 외에 다른 저의를 갖고 있었다. 먼저 일인들은 매입한 읍성주변의 땅은 읍성이 철거되었을 때 개발가치가 폭등할 것이 뻔했다. 또한 경부선 건설로 대구에 정착한 철도노동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려면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석재로 하천부지를 매립하거나 건물과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공사거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경부선 철도의 개통을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매입해 둔 대구역 예정지를 비롯한 도원동 일대 수만 평의 땅을 매립하기 위해서는 대구읍성의 철거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인들이 매입한 도원동 일대는 지금의 동성로보다 2m 낮은 달서천의 범람원으로서 저습지였기 때문에 대구의 하수가 모여드는 쓸모없는 땅이었다. 이외에 <대구물어>를 보면 당시 거류민단의 속사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 <대구물어>에서 기록한 읍성파괴
성벽해체는 박중양의 결단이었고 대구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관찰사 서리가 파괴공사에 착수하면서 내부대신內部大臣에게 신청서를 우송하였다. 이는 예정된 계획이었다. 8일째에 불인가 명령이 통달되어 왔을 뿐 아니라 한국 정부는 박중양의 비위를 규명하기 위해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아 이를 보내왔다. 박씨의 신변이 점점 위태해졌으나 이토伊藤博文 공의 주선으로 다행히 무사하게 되었다. 1909년 박중양의 경상북도 관찰사 시대에 소위 십자도로의 개통을 보았다. 십자도로라 함은 부청府廳 앞에 상정(포정동), 본정(서문로=국채보상로),에 이르는 동서선과 경정(종로)에서 대화정(대안동)에 이르는 남북선을 말한다. 경비는 한국정부의 국고지원으로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병이 되고 말았다. 박중양은 충청남도 장관으로 영전되었다. 대구부민이 사은의 뜻으로 금줄이 달린 금시계를 선물하였는데 시계 뒤 뚜껑 안쪽에 이중 십자형을 새겨 넣었으니 이는 성벽 파괴의 공적과 십자로 개통 배려를 상징한 것이다. 그만큼 박중양은 대구의 은인이었다. 성벽 해체소식을 재빨리 들은 사람들이 눈먼 땅을 사재기하여 일시에 자산을 불렸다. 성벽이 아직 있을 때 원정(북성로)은 성안과 성밖의 땅값 차이가 너무 컸었다. 성밖이 평당 6원에서 10원 정도, 성안은 평당 2,3원하던 것이 도로가 개설되고 나자 당장에 10배 이상으로 뛰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벽파괴로 해체되거나 없어진 것으로 오늘까지도 아쉬운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