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을 막으려 지었다가 일본을 위해 허문 박중양의 대구읍성 파괴
왜군을 막으려 지었다가 일본을 위해 허문 박중양의 대구읍성 파괴
일본이 대구에 발을 들인 것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병참부대가 달성공원에 잠시 주둔했을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전 1893년 남문정에서 의약 및 잡화상점을 운영한 오까야마 출신 하자쓰기膝付, 무로朴井라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하긴 했었다. 청일전쟁이 끝났지만 일본은 철수하지 않고 헌병과 통신수비대를 잔류시켰다. 그리고 하자쓰기와 무로의 두 상점과 병참부 조달점調達店과 음식점 하나만 남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대병력으로 다시 강화되어 주둔하게 된다.
같은 해 1904년 8월 일본인들은 대일본거류민회大日本居留民會를 설립해 식민지 개혁의 길을 연다. 당시 대구의 일본인은 약 1,000명으로 인두세를 거두어 민단을 운영했다. 민단의 설립은 경부선 공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904년 8월 1일 대구역이 설치되고 거류민단은 시가지쪽으로 있는 철도용지 6,800여 평을 차용하여 거류민에게 임대. 2,000여원의 재원을 확보하면서 역전도로가 상점가를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군인들과 철도공사 인부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관찰사 이용익은 일본인들에게 땅을 팔거나 친일행위를 하면 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1905년 진동문(현재 동성로 제일은행) 앞에서 일본인들이 친일한 대구 사람 2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성 시위를 했다고 한다. 대구판관 박중양과 일본수비대장 육군 히다까가 사태를 중재해 수습했다고 하며 29일 한국인 전원을 석방하면서 종료했다. 1905년만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역전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지만 1906년에 대구읍성 외곽의 토지를 절반 이상 소유하게 된다. 대구읍성 안은 국유지였기 때문에 소유하긴 힘들었고, 읍성이 있어 상업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일본민단은 성벽이 성 내외를 격리시켜 교통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성장에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1906년(광무10년) 대구에 설치된 이사청理事廳의 당시 부이사관 오까모도岡本와 가게야마影山 거류민 단장은 당시 관찰사 직무대행을 하며 대구군수로 있었던 박중양에게 성벽의 철거를 주장하게 된다. <대구물어, 손필헌 역> 참조
● 대구읍성 파괴를 주도한 박중양
경상감영과 대구읍성은 나라가 세운 행정기관이라 할 수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경북도청과 경남도청을 합한 규모의 행정기관을 도지사 직무대행을 겸직으로 하던 일개 시장이 정부의 허가도 얻지 않고 옮기거나 허물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정권말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를 받았던 박중양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박중양은 다음와 같은 성벽철거 요청을 1906년 10월 조정에 보내게 된다.
‘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시청이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
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
1906년(광무10년 10월)
경상북도관찰사서리 대구군수 박중양朴重陽
박중양은 결제 보고서를 올리기 전 이미 철거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성벽철거로 인한 대구시민들의 동요를 염려한 박중양은 이와세岩瀨靜, 나카에中江五郞平, 이토伊藤元太郞, 사이토 등을 이들을 부산으로 보내 한국, 일본인 인부 60명을 대구로 데려와 한밤중을 이용, 성벽 수개 처를 허물었다. 보고서를 받은 조정에서는 박중양의 의견이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 성벽의 철거작업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1906년 11월 허가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철거를 진행한 박중양의 죄를 물어 해임하고자 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로비로 무마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철거작업이 반 이상 진척되어 있었던 관계로 중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박중양은 철거를 멈추지 않았고 1907년 4월 대구시민을 동원하여 동남쪽 성벽도 철거를 완료했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12일자 신문에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들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구부민 수만 명의 수고 끝에 세운 읍성을 일본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는 것은 대구근대 100년간의 역사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중양은 경상도 관찰사무를 일본 경찰관사에 위임하고 지방관아의 핵심건물인 선화당에 일본이사청을 설치하도록 돕는 등 1910년 국권을 강제적으로 침탈당하기 전에 한국지방정부의 권위와 상징을 일본인거류민회에게 위탁시켜 버린다. 성곽을 허물고 난 자리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건설자본을 등에 업고 대구에 발을 들인 일본인들에게 더욱더 도움이 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